클래런스 토머스

2022. 6. 25. 23:05인물

미합중국 연방 대법관 클래런스 토머스

 

클래런스 토머스는 미국의 연방 대법관이다. 흑인으로는 두번째로 연방 대법관의 자리에 올랐다. 2022년 현재 토머스는 총기, 낙태, 인종, 동성결혼 등의 여러 이슈에서 대법관 중 가장 보수적인 인물로 여겨진다.

 

호주 ABC에서 2020년 2월 8일에 게재한 기사를 요약하여 정리한다.

 

정치학자인 코리 로빈은 토머스의 대법원 의견 수백 건을 연구했다. 로빈에 따르면 젊은 시절의 토머스는 말콤 X의 추종자였고 급진 좌파였다. 그리고 현재의 보수적인 이념은 그런 급진적인 근원과 그다지 모순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토머스는 1950년대 조지아 주 서배너에서 성장했다. 당시에는 인종 분리가 이뤄지고 있었다. 대학에 진학한 후로는 흑인 총학생회에 들어가 싯인 시위 등에도 참여했다. 그 시절 토머스는 맬콤 X의 연설을 LP로 듣곤 했다. 1980년대에 레이건 행정부에 들어간 뒤에도 맬콤 X의 발언들을 인용하곤 했다.

 

젊은 시절의 클래런스 토머스

토머스의 이념적 변화는 1970년대 초반에 예일 로스쿨에 입학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그의 입학은 입학생의 10%를 소수민족에 할당하는 어퍼머티브 액션에 의한 것으로 여겨졌다. 당시 토머스는 그런 분위기에 적대감을 느꼈다. 어퍼머티브 액션으로 흑인이 이룬 성취에 낙인이 찍힌다고 여겼다. 당시 토머스는 북부의 진보주의자건 남부의 보수주의자건 백인은 교정할 수 없는 인종주의자라고 여겼다. 북부는 흑인들에게 자유의 장소로 여겨졌지만, 토머스 본인에게는 백래시의 공간이 되었다. 당시 토머스가 자신이 성장한 지역으로 비교적 친숙했던 남부의 백인과 비교해 북부의 백인들에게 배신감 이상을 느꼈다고 코리 로빈은 분석했다. 예일에서부터 토머스는 보수적인 경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72년에 한 백인 학생이 토머스가 잃어버린 지갑을 찾아다 돌려주었다. 둘은 친해졌고, 특히 사상적으로 스파링 파트너가 되어 주었다. 그 백인 학생이 존 볼턴이다. 1975년에 토머스는 <인종과 경제>라는 책을 받았는데 저명한 흑인 경제학자 토머스 소웰이 쓴 것이었다. 이 책은 흑인이 정치적 다툼으로 가면 결국 패배하고, 진정한 자유는 자본주의에서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 시기에 토머스의 정치적 성향은 변화하였다.

 

존 볼턴과 클래런스 토머스와 토머스의 휘하 로 클럭들

 

1991년에 대법원에 가게 되면서, 토머스는 흑인 보수주의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리고 연간 100에서 150건 정도의 판례를 통해 자신의 견해를 나타냈다. 코리 로빈은 7백 건의 의견을 분석했고, 이를 통해 토머스가 미국의 흑인들에게 정부가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주 적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투표권 문제에서 토머스는 소수집단에 더 접근을 부여하는 데 반대하고 있다. 로빈은 이를 두고 토머스가 미국의 흑인들에게 일반 정치를 사회적 변화의 경로로 여기는 걸 멈추라고 말하고 있다고 하였다. 토머스는 미국 흑인들이 정치적 활동에 자신의 시간과 노력, 희망과 상상력 등 너무나 많은 것을 투자하고 있다고 여긴다. 로빈은 이러한 견해가 흑표당(black panther) 같은 흑인 민족주의와 유사점이 있다고 하였다. 미국에서 흑인 민족주의자 내부에서는 흑인들의 정치 참여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보는 전통이 있었다.

 

또한 토머스는 흑인들에게 자본주의 경제의 일익을 담당하라고 말하고 있다. 코리 로빈은 토머스가 흑인들이 자본주의 시장에서 가진 영역이 거의 없어 흑인 사회를 이롭게 해줄 자원의 축적이 부족하다고 여긴다고 추정했다.

 

토머스 대법관은 정부의 분배 정책과 복지 정책이 "더 기만적인 형태의 노예제"라고 여긴다. 이 제도가 강인한 흑인 남성의 전통적인 역할을 깎아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코리 로빈은 토머스가 정부와 백인의 도움이 흑인 남성의 권위와 훈육과 힘을 낮춘다고 여겼다. 궁극적으로 이는 흑인 사회의 약화로 이어진다는 게 토머스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나아가서 로빈은 토머스가 흑인 사회 내에서 보수주의를 키워 민주당과의 전통적인 동맹을 끊기를 원한다고 본다. 토머스는 흑인들이 민주당과의 동맹에서 잃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기를 원한다고 로빈은 말한다.

 

정치학자 데이비드 스미스는 토머스의 이런 극보수적인 입장이 오히려 토머스의 영향력을 낮추고 있다고 여겼다. 왜냐면 판결의 표결에서 뻔히 어떨지 예상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갈라진 대법원에서는 중재를 맡은 대법관의 영향력이 클 수 밖에 없다. 또한 TV에서 말하는 일도 거의 없고, 조용한 편인 토머스의 성격 때문에 앤소니 스칼리아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들 같이 컬트적인 추종자도 갖지 못 한다.

 

하지만 토머스는 연구관(law clerk)에 관해서는 큰 성취를 이뤘다. 밑에서 일했던 연구관들이 트럼프 행정부에 판사로 임명됐거나 백악관에서 일하는 경우가 대법관 중에 가장 많다. 토머스는 비교적 젊을 때 대법관에 임명됐기 때문에, 80세 생일까지 재직하면 역대 최장 재직 대법관이 된다.

 

클래런스 토머스와 아내 지니

클래런스 토머스는 1971년 캐시 앰버시와 결혼하였으나 1984년에 이혼하였다. 이후 1987년에 버지니아 램프와 결혼하였다.

 

아들 자말과 며느리 사키나 가족

자녀로는 전처인 앰버시와 1973년생인 아들 자말을 두고 있다. 이혼 후에 자말의 양육권은 클래런스 토머스가 지녔다. 클래런스 토머스는 자신의 차를 팔아 아들을 사립 학교로 보냈다. 토머스 본인은 아들의 사생활에 관해 언급하는 일이 없으며, 링크드인 등을 볼 때 아들은 투자은행 등에서 일하고 있다. 며느리인 사키나는 변호사이며, 아들이 하나 있어서 클래런스 토머스에게는 손자가 된다.

 

 

출처

https://www.abc.net.au/news/2020-02-08/supreme-court-judge-clarence-thomas-from-left-to-right/11924050

 

He was once a Black Power activist. Now he has a hardline stance on abortion, gun rights — and race

The most conservative judge on the US Supreme Court was once a "dedicated black militant" who memorised the speeches of Malcolm X. This is the story of his "long march to the right".

www.abc.net.au

https://celebsuburb.com/where-is-jamal-adeen-thomas-now-all-about-clarence-thomas-son/

 

Where Is Jamal Adeen Thomas Now? All About Clarence Thomas Son

Jamal Adeen Thomas is the only son of Clarence Thomas. Where is he now? Find out Jamal Adeen Thomas mother, wife, wiki, and more!

celebsubur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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