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8. 10:51ㆍ세계의군대
배경
과테말라 개관

과테말라는 중앙아메리카에 위치한 나라다. 이웃 나라는 서쪽에 멕시코, 북동부에 벨리즈, 동쪽에 온두라스, 남동쪽에 엘살바도르이다.
면적은 10.9만 제곱킬로미터 정도로 남한의 면적 보다 조금 크다. 인구는 1천 8백만 수준이며, 백인과 원주민의 혼혈인 메스티소가 56%, 마야인이 41% 정도이다. 마야 문명은 멕시코 저지대와 그 이남의 중앙아메리카 일대에서 발달했기 때문에, 마야의 후손들이 많다.
과테말라의 역사
과테말라군은 전통적으로 정치에 깊게 개입하였다.

마야 문명이 스페인의 침략으로 몰락한 뒤에 이 지역은 Nueva España 부왕령에 속해 멕시코와 관리되었다. 1821년에 멕시코가 독립하면서 멕시코 소유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1823년에 중앙아메리카 연방이 생기면서 이곳에 속했다가 1838년에 독립했다.

과테말라는 정치적 혼란을 겪었는데, Rafael Carrera(1814-1865)가 과테말라의 내셔널리즘을 정립하며 현재의 형태에 이르도록 하였다. 카레라는 원주민에게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대통령으로 여겨진다.

19세기 후반부터 과테말라는 미국 기업인 United Fruit Company(UFC)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토지 문제를 겪었다. 원래 마야 원주민들은 토지를 공동소유했는데, 과테말라의 정권은 이런 토지를 몰수해 이민자에게 넘겼다. 이 시기에는 군인들이 현역 군인으로 근무하면서 주지사 등을 맡는 등 사회 전반에 군의 영향력이 강했다.

1921년에 José María Orellana(1872-1926)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오렐라나는 쿠데타를 일으킬 때 미국 기업인 UFC의 지원을 받았다.

1931년에는 Jorge Ubico(1876-1948)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과테말라를 경찰 국가로 만들었다. 비밀경찰을 사랑하던 우비코는 1944년에 10월 혁명으로 축출되었다. 우비코 시절에 과테말라는 부랑자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고, 지주에게 처형 권한을 주는 등 억압적인 정책을 취했다.

1944년 이후 10년간 과테말라는 민주적인 사회로 이동했다. Juan José Arévalo(1904-1990) 대통령 시절에 군부의 쿠데타 기도가 25건이나 있었을 정도로 기준의 군부 세력은 불만을 보이고 있었다. 최저임금이 도입되고 참정권 확대 등의 조치가 이뤄졌다. 아레발로는 과테말라가 독립하고 124년만에 처음으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이런 개혁 조치로 인해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미국의 정보원들 일부는 아레발로는 민주사회주의자이며 공산주의자는 아니라고 변호했지만 미국의 과테말라 정책 수립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이어서 군인 출신의 대통령인 Jacobo Árbenz(1913-1971)가 등장했다. 아르벤스는 군부 출신이었지만 리버럴한 성향으로 토지 개혁을 하였다. 전임자인 아레발로 정부 시절에 국방장관으로 쿠데타를 잘 막기도 하였다. 아르벤스를 지지하는 군인들은 뒤에 군을 이탈하여 좌익 반군에 들어가게 되고 내전의 장기화에 영향을 미친다.
변수는 미국이었다. 공산주의 정당인 과테말라 노동당이 합법화되는 등 좌익 세력이 성장하자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에 공산주의가 퍼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과테말라에서 노동력 착취로 돈을 번 UFC도 과테말라 개입을 요구하였다. 트루먼 행정부가 작전을 승인했고 이후에 정권교체가 이뤄져 등장한 아이젠하워 행정부도 이를 유지하였다.

Carlos Castillo Armas(1914-1957)가 이끄는 반란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과테말라 군대는 분열하였고, 아르마스가 대통령이 되었다. 아르마스는 소련과 아르벤스 정부가 연계되었단 주장을 했지만 증거는 못 찾았고 대신에 야당을 금지하고 정치적 반대자를 수감, 처형하였다.

미국은 Miguel Ydígoras Fuentes(1895-1982)를 쿠데타의 리더로 고민하였으나 백인이라서 지지를 얻기 힘들겠다 싶어서 대신에 메스티소인 아르마스를 골랐다. 아르마스는 1957년에 경호원에게 암살되었다. 그러자 푸엔테스가 정권을 차지한다. 푸엔테스 시절에 해군이 창설된다.

이후 1963년에 쿠데타가 일어난다. 케네디 행정부는 1963년에 치러질 대선에서 아레발로 전 대통령이 승리할까봐 쿠데타를 승인했다. 미국은 아레발로가 공산주의자라서 안 된다고 하였다. Enrique Peralta Azurdia(1908-1997) 대령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후 1966년에 민정에 이양하였다.

그런 이유로 과테말라는 1960년부터 1996년까지 좌익 반군과 군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내전 시기에 마야 원주민들은 학살을 당했다. 반군에게 협력적이란 이유에서였다.

1982년에 Efraín Ríos Montt(1926-2018)가 쿠데타를 일으켜 Fernando Romeo Lucas García(1924-2006)를 쫓아냈는데 둘 다 군인 출신이었다. 몬트는 가톨릭이 다수인 과테말라에서 근본주의 개신교 종파 소속으로 기존의 가톨릭 기득권을 배제하였고 선거를 거부하는 등 통치상 약점을 보였다. 그때문에 보수적인 군인 정권임에도 같은 군인들에게 지지를 별로 못 받았다.

17개월 뒤에 Óscar Humberto Mejía Víctores(1930-2016)가 쿠데타를 일으켜 몬트는 쫓겨났다. 이후 몬트는 원주민 학살로 80년형을 받았으나 재심 중에 사망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민간인 정부가 다시 들어서면서 민족화해위원회가 생겨나고 내전 시기의 학살 문제 등이 조사되었다. 사망자와 실종자가 약 20만에 이르렀다.

1993년에는 대통령인 Jorge Serrano Elías(1945-)가 친위 쿠데타를 기도하여 헌정 위기가 왔으나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헌법재판소가 막자 세라노는 망명했다.

현재 과테말라의 대통령인 Bernardo Arévalo(1958-)은 1940년대 말에 대통령을 지낸 아레발로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쿠데타 군에 의해 쫓겨나서 우루과이에 머물던 시절에 태어났다.
이런 이유로 인해 과테말라 군은 군축을 겪었다. 1996년 이뤄진 평화협정은 군의 규모와 예산을 1/3로 줄인다고 하였다. 미국 국방부는 원주민 학살을 저지른 장교들이 처벌된 뒤에 과테말라에 군사 지원을 재개하였다. 사실 이 학살을 일으킨 배경에 미국이 승인한 쿠데타가 있는 걸 생각하면 미국도 책임이 있긴 하다.
현재 과테말라군의 병력은 4만 정도이다. 예비역이 6만 정도로 이런 소국의 군대 치고는 많은 편인데, 군축의 영향으로 예비역으로 돌린 게 많지 않을까 싶다. 국방비는 2022년 기준 3.9억 불 정도였다.
군의 구성
육군

과테말라 육군은 1851년에 창설되었다. 기갑전력은 없다. 하지만 기병기갑연대가 존재하기는 한다. 전체적으로 군 규모가 작기 때문에 18개 군사 지역별로 나뉘어 대대 단위로 편제가 이뤄져 관리되고 있다.
해군

해군은 과테말라가 두 개의 바다를 접하고 있어 태평양사령부와 카리브해사령부로 나뉘어진다.

선박은 순찰선 정도의 영세한 규모다. 해병대가 있어서 상륙정을 갖고 있기도 하다.
공군

과테말라 공군은 1940년대에 창설되었다. 주로 수송기와 정찰기로 구성되어 있다.
기타
군사계급


장교의 경우 대장은 국방부장관, 중장은 참모총장 전용 계급이다. 위관급이 넷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병의 경우 부사관이 다섯 계급, 병사는 2개 계급으로 구성되었다.
현재 주요 구성원

국방부장관인 Henry Saenz Ramos의 경우 계급장이 비어 있다. 연구자 출신의 민간인으로 추정된다.

전임자인 Henry Reyes Chigua의 사진을 보면 별 네 개를 볼 수 있다.

참모총장은 William Arnulfo López 중장이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지휘봉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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